단수이 고적 박물관

매표소
「청나라단수이 세관 세무사 관저」는 단수이푸딩(淡水埔頂) 에 위치해 있으며,하얀 외벽으로 인해 현지 사람들에게‘작은 하얀 집’이라는 뜻의 샤오바이궁(小白宮)이라는 애칭으로 불려졌다.
1862년 단수이에서 후웨이양관 (滬尾洋關)을 설립하여 정식으로 세금 징수를 시작하였다. 후웨이양관은 해외무역과 관련된 모든 관세를 관리하는 대만 최초 관세기관이며, 그 뒤에 안핑(安平),지롱(基隆), 까오슝(高雄) 등에도 세관서가 설립되었으며, 모두 후웨이를 본사로 하여 전국 모든 세관업무를 총관하였다.
1863년 청나라의 동의하에, 양인이 부세무사(副稅務司)를 맡아 실질적으로 양관의 행정과 세무권을 장악하였다. 후웨이양관은 외국인 세무상사의 관리하에 제도를 마련하여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국제항으로 거듭났으며, 동시에 청나라에게도 많은 이익을 가지게 했다.
관세업무가 날로 번잡해짐에 따라, 외국인 관원 또한 점차 늘어나서, 숙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푸딩에 토지를 매입하여, 관저를 지었다. 1875년에 제 2동 숙소를 증설하여 서기와 말단 세관원들에게 사용하게 했으며, 현지인들에게는 싼콰이추오(三塊厝)라고 불려졌다. 그러나 1884년 청불전쟁이 일어나면서 말단 세관원의 숙소는 파괴되었다.
일제시대에 이르러, 단수이항의 몰락으로 관세는 점점 줄어들게 되어 일본 관세장은 「오십회클럽」(五十會俱樂部)을 조직하여 회손된 관저를 재건축하고, 당국의 숙박시설과 호텔로 사용하도록 변경하였다. 대만 광복 후에 재정부 타이페이 세관(지롱 세관서)에서 인수하였으며, 3개 동의 관저숙소에서 한 동만 남게 되었고, 또한, 이곳은1950년 당시 세무서장이였던 미국인 Lester Knox Little의 숙소로도 사용되었다.
1996년 샤오바이궁은 신관 개조로 철거 위기를 맞게 되는데, 운좋게도 현지 인사 및 전문학자들의 노력하에 1997년 정부에서는 고적지로 결정하여 오늘날까지 비로소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속빈벽돌벽
여기서 샤오바이궁을 창건할 당시에 흑벽돌로 쌓아서 만든 속빈벽돌담장의 일부분을 볼 수 있으며, 후에 건물 전체를 수리 복원할때는 다른 재질로 담장을 사용하였다.

수도꼭지
일제시대에는 적극적으로 상수도 건설을 기획 추진하여, 단수이에서 대만 처음으로 현대화된 정수장을 건립하였다. 다툰싼루(大屯山麓)의 수원을 끌어내려 청결한 용수를 안정적으로 제공하였으며, 현지인들에게 물을 긷는 수고를 덜어주었다. 또한 소방 기능까지 갖추게 되었다. 취수 설비가 우체통 모양과 비숫하여 현지인들은 이것을 수도꼭지라는 뜻의 「쑤이꽌토우」 불렀다.

전망대
현재의 자리에서 관음산과 단수이강을 바라 볼 수 있으며, 또한,단수이의 아름다운 경치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맞은편의 관음산과 관련하여 옛날에는 「빠리펀싼」(八里坌山),「씽쯔싼」(興直山)이라 불렸으며, 이후에 관음산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는데, 생겨난 연유에 대해 여러 일설들이 있다.
첫번째로는 관세음이 반듯이 누워있는 모습의 형태로 가장 높은 곳은 관음의 턱, 밑에 움푹 들어간 곳은 눈자위, 이어서 이마, 그리고 바다로 뻗어 들어가는데, 전체적으로 보면 볼수록 관음의 옆모습과 흡사하여 관음산이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것이다. 두번째로는 산 위에 관세음을 모신 사찰이 유명해 져서 그래서 관음산이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것이다.

대문 경계석과 지단화
일제시대에 새로 단수이 세관을 개설하고, 그곳에 소속된 경계 지역에 비석을 세워서 표시를 했는데, 이것이「단수이세관소유지」경계석의 유래이다.
대만 광복 후에, Lester Knox Little세무서장은 세관의 소유지를 재차 확립하고, 관저 및 단수이세관 부지에 다시「세무관서 경계석」을 여러개 세웠다.
오늘에 이르러,「단수이세관소유지」경계석은 총 4개가 존재 하는데, 세관박물관¬ 설립 초기에 그 중 하나를 소장하였고, 다른 세 개는, 즉 2014년에 세관부두를 보수할때 파내어, 본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그 외에「세무관공서 경계석」은 현재 3개가 존재하는데, 하나는 세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또 하나는 단수이 중정로(中正路) 364호 앞에 세워 있으며, 마지막은 본관에 소장되어 있다.본관은 샤오바이궁내에 「단수이세관소유지」와「세무관서 경계석」을 다시 여러개 세워 이것을 기념하였다.
샤오바이궁 정원 문 옆 가까이에 높이 우뚝 솟은 지단화 (플루메리아, Plumeria) 한 그루가 있는데, 강한 생명력으로 짙은 향기를 풍기며 아주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영국인이 심었다고 전해지며, 샤오바이궁에 이미 백년이 넘게 꿋꿋하게 서 있다. 신베이시청에서는 이 지단화를「진귀한수목」으로 등재시켜 별도로 관리하고 있다.

뚝향나무 해설판
영국의 식민지를 거쳤던 홍콩, 싱가포르 등 아시아 여러 나라들은 식민지식의 회랑 건축을 많이 응용하였는데, 샤오바이궁 또한 이러한 전형적인 대표 건축물 중에 하나이다. 이런 유형의 건축은 지대가 높고, 모임지붕, 회랑 같은 발코니, 큰 창문과 굴뚝 등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샤오바이궁의 토대는 석재를 사용하여 쌓았으며, 지면에서 약 1미터 높이로 건물입구에서부터 존귀한 기세가 품어나온다. 이외에 토대의 바깥쪽 주변에 공기가 잘 통하도록 몇미터씩 간격을 두고 사각형의 철통을 끼워넣어, 습기가 차지 않도록 통풍구를 만들었다.
이외에도 샤오바이궁 동,서,남, 세면에는 회랑과 유사한 발코니를 설계하여, 건축면적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샤오바이궁 정면에는 단수이강을 향한 11개의 둥근 아치형이 있고, 다른 동,서면에는 각 각 4개의 둥근 아치형이 있다. 규칙적으로 대칭된 아치형은 시각적으로 조화롭게 보이며 온화한 미감을 느끼게 한다. 동,서,남 세면의 아치회랑은 비를 피해주고 자외선을 차단해 주는 역할 외에도 햇볕이 들어오는 공간들을 증가시켜 각 공간들 모두 충분한 일조량과 시야를 확보하게 하여 최고의 여가생활 공간으로 제공되어 졌다.
동시에 아치형 회랑 창문 위에 그와 상응하는 목재 블라인드를 설치하여 직사광선을 조절할 수 있으며, 빛을 차단하는 차양의 효과도 주고 있다. 모임지붕의 특징은 배수가 용이하며, 높게 파여진 지붕은 실내 공간을 더 넓혀주고, 다락방을 사용할 수 있게 디자인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단열에도 효과적이다.

관세전시 구역
현재의 방은 벽난로를 중심으로, 그 내벽은 세개의 공간으로 나눠지는데, 그중 벽난로가 설치된 곳이 비교적 넓은 편이다. 아마도 서재와 집무 기능의 공간이나 혹은 작은 거실로 사용했을 것이라 추정된다.
비록 대만이 열대 기후로 벽난로의 온기가 필요치는 않지만, 유럽식의 건축양식을 통하여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반영한 것이다.
그외 한 쪽에 비교적 작은 공간은 원래 2개 방이였던 것을 내벽을 허물어 하나로 합쳐 비교적 큰 공간으로 만들어 욕실과 창고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본관홀
현재의 위치는 샤오바이궁의 정중앙으로 가장 큰 공간이다. 좌우 두짝의 문이 복도에서 대문까지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대외 접대 공간으로써 정식적인 응접실이나 비교적 큰 생활 공간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본관홀 뒤쪽 벽에는 비대칭의 직사각형 구멍이 두 곳 있는데, 창문의 모양으로 보이지만, 사실상 창문의 기능은 없다. 그 벽과 서로 연결된 공간이기에 일제시대 주방으로 사용하기 위해 증설된 것으로 구멍의 크고 작은 형태는 음식을 배달하기에 딱 적합하다. 즉, 이 공간은 이전에 응접실, 식당의 기능을 겸하고 있었다.

건축양식 전시홀
현재 방은 두 짝의 문이 복도로 통하게 되어 있고 평면에 합당한 대칭된 설계로 볼 때, 원래 2개의 공간으로 사용 되어, 주로 침실 기능을 한 공간으로 보여진다.
시공할 때 내벽을 헐어 크고 넓은 안방으로 만들고 회랑위쪽 공간에 욕실을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내부에 여전히 둥근 아치형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각 각 네개의 좌우 대칭의 둥근 아치 회랑이 존재하고 있는 샤오바이궁의 원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매표소
1884년에 일어난 청불전쟁은 지롱에서 시작하여 단수이까지 확대되었고, 결국 청나라의 승리로 끝났다. 그리고 평화 협정을 맺은 후에, 서둘러 대만을 중국의 하나의 성으로 만들었다. 대만 초임 순무 리우밍추안(劉銘傳)은 해안 방어의 중요성을 깨닫고, 대만 해안 방어 강화를 위해서 각 항구에 포대를 증축해 방어를 편리토록 하였다.
그해 독일 엔지니어 Lieut Max E.Hecht를 초빙하여, 신서양식으로 전국에 10개의 포대를 지었으며, 상인방 「베이먼수어야오 」 (北門鎖鑰)의 포대가 그 중 하나로 지어진 것이다. 포대는 단수이하구 근처, 즉 하구주변에서 가장 높은 관측점에 자리 잡고 있어서, 단수이강 및 왕래하는 선박들의 동향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일제 시대에 단수이 군사적 가치가 청나라 시대보다 중요시 되지는 않았지만, 그 지역을 여전히 군사 사격 연습 장소로 사용하였다. 대만 광복 후 후웨이 포대(滬尾礮臺)는 국군이 주둔하게 되고, 1985년에 이르러 국가 고적지로 지정되어 타이베이현(신베이시 정부)에서 보수 정비를 거친 후에 참관하는 것을 개방하였다. 후웨이 포대는 1886년 완공된 후 전투가 더이상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베이먼수어야오
후웨이 포대(滬尾礮臺)는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는 시야가 좋으며, 주변에 토담과 울창한 숲이 어우러진 은밀한 위치로 발각되기가 쉽지 않아 수비는 쉬우나 공격은 어려운 지리적 요건을 갖추고 있어서 방어성이 최고인 「숨겨진 포대」가 지어져 있다. 포대의 구도는 「회(回)」자의 직사각형 설계로 서북에서 동남방향으로 단수이강을 직면하고 있으며, 토담(土垣)에서부터, 참호 (壕溝), 영문(營門), 자담(子牆), 대포대(礮座), 덮개(被覆), 통로(甬道), 그리고 마지막으로 광장(廣場)의 순서대로 외부에서 내부로 구분되어 진다.
토담(土垣) 또는 모담(어머니의 담)이라고도 부르며, 포대 주위에 흙더미를 쌓아 포대와 같은 높이로 하여 은폐와 방어 기능을 가진다.
토담과 자담 사이에 참호로 둘러싸여 있어, 해자(垓字)와 같은 방어 기능을 제공한다.
포대의 유일한 출입구는 동남 방향의 영문(營門)으로, 상인방(門額)위에는 리우밍추안(劉銘傳)이 직접 쓴「베이먼수어야오(北門鎖鑰)」라는 네 글자가 있는데, 출입구의 반원 아치문과 상인방은 모두 관음산의 돌을 사용하였다.
자담(子牆)은 포대의 주요 벽체로써 포대를 쉽게 쳐부수지 못하도록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 리우밍추안(劉銘傳)은 특별히 서양의 철시멘트를 사용하여 자담을 지었다. 이러한 시멘트는 당시에 매우 고가여서 후에는 일부 자담을 토담으로 지었고, 대신 겉면에 철시멘트를 칠하여 견고하게 하였다.
병사들 방 위쪽에 점토로 덮여진 것을「덮개」라고 부르는데 재질이 부드럽고 유연하여 빨아당기는 탄력 효과가 있다. 덮개 위에 굴뚝같이 튀어 나온 곳이 바로 병사의 통풍구이다.

중앙광장
후웨이 포대(滬尾礮臺)는 1886년에 시공이 완성되었으며, 광장내에 병사건물이 있었지만, 후에 다른 시대들을 거치면서 여러번 개조된 후, 그 건물은 허물어 지고 평지만 남아 있으며, 담장의 흔적만이 조금 남아 있다. 국군이 주둔한 시기 광장에는 사령탑 및 농구장 등 근대 시설을 설치하였으나, 현재 사령탑은 철거 되어졌다. 포대 가장자리의 토담과 자담 및 내부 개방 공간 등에 많은 종류의 식물들이 있으며, 북측 자담에는 주로 멀구슬나무(苦楝) 종자들이 있는데,봄에는 자색의 꽃이 피어 가지와 잎이 무성하며, 겨울에는 잎이 떨어지고 남아 있는 나무와 가지들의 위세가 위풍당당하여 포대의 아름다운 경치를 자아내고 있다. 광장 복도 가장자리에는 주로 연꽃들이 있는데, 국군이 이곳에 주둔할때 물자 보충을 위해 심었으며, 여름철이 되면 도처에 모두 연꽃 잎이 떨어져 있고 가지 끝에는 결실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탄약고 및 탄약운송
탄약창고는 반원형의 둥근천장(vault)으로 전문적으로 탄약을 보관하는 장소이다. 내부에 있는 하나의 벽은 복도와 보호공간 나누고 있다. 탄약고는 또한 두개의 문이 있는데, 하나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소문이고, 다른 하나는 탄약을 운송하는 대문이다. 대포대쪽으로 탄약 운송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특별히 탄약운송로를 설치하였는데, 탄약운송로는 Y자형의 통로로 이루어진 독특한 특색을 갖추고 있다. 오른쪽 통로는 영국제의 Armstrong's Rifled Breech Loader로 통하게 하였고, 왼쪽 통로는 독일제의 Krupp Gun으로 통하게 만들었다.

서북 대포대
그 해 리우밍추안(劉銘傳)은 영국상 이화양행을 통하여 해외에서 대포 31대를 구매하여 서양식으로 새로 건축한 전국 포대에 설치하였다. 당시 후웨이타오타이는 12인치,10인치의 영국 Armstrong's Rifled Breech Loader가 각 각 한 대씩, 그리고 8인치의 독일 Krupp Gun이 두 대로, 대포대는 바다면 두 측에 집중되어 있었다. 가장 큰 12인치의 Armstrong's Rifled Breech Loader는 서북 쪽에 설치했으며, 360도로 전체가 둥근 기계포가를 사용하여 사격 각도가 단수이하구 및 북쪽 해안까지 모두 포함되었다. 현재는 포가 궤도 흔적만 남아 있다. 포구 앞의 자담은 활모양으로 아래를 오목하게 만들었는데, 이것은 탄도 발사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설계된 것이다. 국군 주둔 시절에 바로 이 대포대 앞쪽에 기관총대를 추가 설치하였다.

서 대포대
독일제의 Krupp Gun과 영국제의 Armstrong's Rifled Breech Loader는 19세기 중 후반 시기에 매우 유명했던 현대식 화포였다. 12인치 구경의 Armstrong's Rifled Breech Loader와 비교하여 8인치 구경의 Krupp Gun은 반 원형의 기계포가로 궤도 흔적이 상대적으로 매우 작아 발사 각도도 매우 협소하다. 후웨이 포대의 4곳의 대포대는 모두 후당포(後膛礮)에 속하며, 후장포(後裝礮)라고도 한다. 전당포와 다른 것은 후당포는 대포 끝에 탄두를 넣어서 빗장을 봉한 후에 발사가 되는 것이다. 후당포의 포수 조작은 대포단 뒷쪽에 자리하고 있어서 쉽게 위치가 노출되지 않는다. 대포대 옆의 자담에는 탄두 형상의 홈이 여러개 남아 있어서 탄두 비축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북 통로
통로가 가리키는 곳은 자담 안쪽을 둘러싸고 있는 반원형의 터널로, 사병침실, 저장실, 탄약고 및 일상생활 공간으로 사용하였다. 통로간에는 서로 통하게 되어 있어서 전투시 사병 배치의 기동성에 탁월하다. 국군 주둔 시절 동북쪽에 지어진 주방과 욕실을 허물어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시켰다. 통로의 재료는 돌을 기반으로 삼기에 재료는 치리안(唭哩岸)의 돌이 대부분이며, 일부분은 관음산의 돌을 사용하였다. 그 위에 다시 붉은 벽돌로 반원 조금 안되게 활모양의 아치형으로 쌓았다. 쌓아 올린 벽돌 상부에 일정 거리마다 구멍을 뚫어, 통로를 내부에서 외부로 직통하게 하여 공기 순환이 잘 되게 하였다.

남 통로
활모양의 둥근천장(vault)으로 쌓아 올린 통로의 벽돌은 청대에 자주 사용한 「연미전(燕尾磚)」으로 크기는 서양식보다 조금 작고, 측면에 그을린 흔적들이 조금 남아 있다. 통로 내부 양측에는 각 각 한 줄의 작은 구멍이 있는데, 그 기능과 작용을 확실하게 테스트 할 수는 없지만, 당시 건축 시에 상부쪽 아치형의 지붕을 쌓아 올리기 위해 비계(scaffolding)를 설치할 때 사용된 것으로 전해진다.
또 다른 일설로는 벽에 오목하게 들어간 구멍은 국군 주둔 시절에 땅바닥이 습해서 판자 층을 만들거나 침대를 걸어 놓기 위해 사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오늘날 일부 통로의 공간을 전시장소로 바꾸어 포대의 또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경비실
1858년 「텐진조약(天津條約)」및 1860년 「북경조약(北京條約)」 체결 후, 후웨이는 대만 통상 항구가 되었고, 열강들은 이때부터 내수운항권을 가지게 되었다. 1862년 정식으로 세금 징수를 시작하였고, 초임 세무관으로1863년 영국인 John William Howell이 후웨이양관을 맡으면서 서양인이 대만 세관을 관리하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후웨이양관은 청대 대만 제일의 해외 무역 관세를 관리하는 기구로써, 지롱(基隆), 안핑(安平), 까오슝(高雄)등으로 나누어 관리하였다. 일제 시대에 단수이강의 퇴적이 날로 심각해져서 세관서는 1916년에 단수이에서 조금씩 옮기면서 1921년 지롱강으로 이전되었다.
1945년 대만광복 후, 단수이세관부두는 현 정부에서 인수하여 관리 되었고, 그 후 해광예술공작대(海光藝工隊), 해양순찰부서, 해군해교사중대(海軍海蛟四中隊) 및 육군대경삼영경칠연(陸戰隊警三營警七連) 등 국군 부서들이 거치면서, 철근콘크리트 건물들을 하나 하나씩 증축하였다. 2000년 6월 신베이시청에서는 단수이세관부두를 고적지로 지정하였으며, 2014년에는 문화단지로 조성하여 대외적으로 개방하였다. 부두해안은 시야가 탁 트여 우아하면서도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 할 수 있기 때문에 여행객들에게 저무는 석양을 감상하기에 최적의 장소로 손꼽히고 있다.

서양건물
단수이세관은 관서구역, 관저구역 및 부두구역으로 크게 3개구역으로 나눠진다. 관서구역은 1869년에 지어졌으며, 사무실, 선원 숙소 및 창고 등의 시설물들이 자리해 있었다. 위치는 현재 홍마오청 아래쪽 주차장이였으나, 현재는 사라지고 없다. 관저구역은 1866년에서 1875년 기간 동안 잇달아 세무사관저와 숙소를 건축하였고, 현지인은 「샤오바이궁」의 「청나라단수이 세관 세무사 관저 」라고 불렀으며, 그 중에 한 채 밖에 남아 있지 않다.
부두구역은 청대부터 점차 건설하기 시작하여 공사는 일제시대에 가서 비로소 완공되었다. 당시 단수이항의 부두구역은 후웨이거리의 뒷쪽에 중점을 두고 있어서, 즉 오늘날 「더글러스 라프레이크 상사」의 맞은편에서 상선들이 정박하는 경계선까지, 즉 오늘날 지하철역의 서쪽에서 줄곧 따라 나가 나루터까지로, 단수이세관 소재지와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 1893년 세관사무실 앞쪽 해안에 정박하는 선박들에게 「작두펌프」(draw water)를 제공하는 구조들이 생기면서, 관서에서 한 블럭 건너 맞은편 해안구역까지 오늘날 세관부두단지의 주요 범위를 이루게 되었다.

B、C동 창고
일제시기 단수이해안 근처의 부두 여러 곳에는 잔교식(棧橋式)의 「작두펌프」, 정박지 및 선착장들이 두드러져 나타나 있다. 당시 세관부두와 후웨이어항구(단수이 제일 어항구) 사이에 넓은 모래사장이 있었는데, 1900년대에 이르러 간척지 매립 공사를 착수하면서 단수이해안이 오늘과 같은 모습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매립 공사가 끝난 후 세관부두에 곧바로 창고, 숙소, 검사소 등의 건물들을 증축했다.

기계&전기실
오늘날 세관부두는 단수이 세관과 마주한 관저 및 영국영사관저의 부두구역을 가르키며, 보존 범위로 동구간, 중구관, 서구관으로 나눌수 있는데, 동구관부두는 관음산돌, 자갈등급, 콘크리트 및 삼합토 등으로 쌓았고, 중구관은 주로 치리안(唭哩岸)바위를 썼으며, 서구관은 관음산돌을 사용해 교차해서 쌓아 올렸다. 부두 제방에는 계선주(繫船柱)를 설치하였는데, 외관은 각기둥과 원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
과거 국군이 세관부두를 인수할 때 외부에 개방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민중들은 내부 구조를 들여다 볼 수 없었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초기 해안의 한적한 경치가 더욱 완벽하게 보존될 수 있었다. 이곳은 약 200m의 넓고 긴 지대로, 옛거리(老街)에서 위런마토우(漁人碼頭)까지 중요한 교점으로, 단수이 석양을 바라보는데 아주 좋은 장소이기도 하다. 이 곳의 전체지대는 특이한 역사 배경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더글러스 라프레이크 상사
단수이 중정로(中正路) 옛거리 뒤쪽에 자리한 「더글러스 라프레이크 상사」(Douglas Lapraik & Co.)는 19세기말 대만 개항 및 대만 북부 항운 발전의 역사를 증명해 주고 있다. 이 건물은 전동과 후동으로 나눠지는데, 당시 공간 사용의 기능에 따라 이름을 지었으며, 전동을「제일검사장」, 후동은「수입품창고」라고 불렀다.
양행 전동은 다섯 칸으로 나누어 벽돌을 쌓아 올린 구조로,지붕은 전통 기와를 깔았으며, 정면에는 벽돌을 연결한 아치형, 양측면에는 돌을 쌓은 벽, 그리고 내부는 서양식의 목조 틀의 아치형 등 크게 세 구조로 나눌 수 있다. 그 중 벽돌을 연결한 아치형의 구조는 대들보틀과 아치 두 부분을 포함하고 있으며 양측의 벽은 하중벽에 속한다. 목조틀의 아치형은 산모양의 틀과 목조 아치형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괴테풍을 모방한 목조 틀의 아치형은 대만에서 흔히 볼수 없는 예이다.
후동 구조물은 즉, 직사각형의 넓은 공간형의 건축으로, 구조는 지붕트러스, 기둥, 벽 및 토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붕트러스는 특수형식의 중심 기둥식의 목조 지붕트러스와 인장근(引張筋)으로 구성되어 옥상의 무게를 지탱하는 주된 역할을 하고 있다. 그외 동서 양측 벽과 북쪽 벽체는 교차로 벽돌을 쌓았고, 남쪽 벽면은 9개의 아치형 벽돌로 구성되어 있다.
더글러스 라프레이크 상사는 2013년 3월에 원상복구 된 후, 지난날의 역사를 계승해 주고 있다. 단수이 구역의 여러 역사적인 면모와 기억들을 전달해 주고 있어서, 단수이옛거리서부터 푸딩지역까지 문화 자산의 새로운 명소로 자리 잡고 있다.

단수이예술공방
단수이 중정로(中正路) 298호에 위치한 단수이예술공방(Tamsui Art Gallery,TAG)은 신베이시 공공의 녹색건축물의 상좌로, 대만의 「다이아몬드급」 녹색건축물로 선정되어 있다. 일제시대에 4연동형식의 일본식 순사 가솔들의 숙소 자리로, 2011년「단수이하구 이요우사이트(淡水河口藝遊網)」와 협력해 북부를 주도적으로 계획 건설하여 단수이역사구역을 참신한 예술과 창의적 문화 공간으로 조성하였다.
본 건물의 외관은 4층으로 세운 철근 건물로, 정면은 넓은 창문을 사용하여 충분한 일조량을 확보할 수 있게 하였으며, 단수이강의 아름다운 경치 또한 감상할 수 있게 하였다. 옥상 위는 굴뚝형태와 비슷한 구리재질의 원뿔 구조와 태양전지판이 있어 공기가 잘 통하는 효과를 주고, 여름의 무더위를 줄여주는 효과가 있다. 또한 야간 조명을 제공하여 전력 소비를 절약해주는 기능을 갖추고 있다. 그외에도 예전의 건축물의 역사를 유지하기 위해 일식 숙소에서 철거한 기와장을 신건물의 실내 장식에 활용하여 본 건축물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독특함을 선보이고 있다.
현재 일층은 문화관련 상품들 전시 판매 위주이고, 2층은 음식점 및 여러 기능의 무대들이 설치되어 있으며, 3층은 단수이 고적 박물관으로 각종 예술 문화 전람, 강좌 및 교육체험활동을 정기적으로 기획하여 개최하고 있다. 예술조경, 창의적사고, 공간재활용 및 활성화 등의 패턴을 통하여 예술문화생활의 품질을 높이고, 주변 거주자들, 상가들 및 여행객들이 한데 잘 어우러져 단수이 문화산업과 관광휴게지 발전을 활성화 시킬 수 있다.

후쉐이이팡
「후쉐이이팡예술문화공간(滬水一方藝文空間)」은 단수이위런부두에 있는 리빠오(麗寶)쇼핑몰의 3, 4층에 자리하고 있으며, 신베이시청(新北市政府)에서는 단수이위런부두 휴게지의 특색을 강화하고 관광 서비스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 민간 참여 공동 설계법을 추진하여 BOT방식으로 푸롱관광호텔과 쇼핑몰 산하에 귀속된 시설들을 2011년에 완공 한 후, 단수이고적박물관쪽에 경영관리를 위임하였다.
후쉐이이팡은 두개의 층으로, 면적은 각 각 240평과 360평으로 나눠지며, 과거에는 예술문화 전시 공간과 문화단지로 이용했으나, 현재는 3층을 블럭 전시 공간으로 기획하여, 다양하고 뛰어난 블럭 작품 전시 외에도 장내에는 각종 다양한 종류의 블럭풀장과 블럭교구를 제공하고 있다. 방문하는 여행객들에게 자유로운 창작 체험을 제공하여 블럭으로 즐겁게 배울 수 있음을 느낄수 있게 하고 있다. 가족들이 와서 함께 놀기에 적합할 뿐만 아니라 학교동아리나 학원 등 교육관련 기관들의 교외 학습 체험으로도 매우 적합하다.

단수이 가장 타다 이키치 고거
일제시대 단수이 가장(街長)이였던 타다 이키치(多田榮吉)씨의 본적은 일본 효고현 고베시로, 잘 알려진 지주 집안의 장남이였으며, 어릴때부터 기업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1897년 처음으로 대만에 와서 1905년에 단수이 세관의 심부름꾼으로 전전하다가 1919년에 「단수이흥업조합(淡水興業組合)」을 설립하여, 반농반어를 하는 단수이 사람들에게 부업 종사를 북돋았다. 1930년에서 1933년 사이에 제 4대 단수이 가장(街長)으로 임명되어 단수이 도로건설, 도서관 재건 및 학교설립 등 공공사업 추진에 힘을 썼으며, 당대 단수이 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다.
타다 이키치씨가 예전에 살았던 주소는 청나라학해서원학전(清朝學海書院學田)으로, 후에 일본 학산재단 소유가 된다. 이 건물은 1934년에 건축되어, 수돗물을 신청하여 단수이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비교적 일찍이 수돗물을 사용한 민가로써, 이 건물은 인문(人文)의 가치 외에도 지역 발전상 중요한 이정표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대만 광복 후, 타다 이키치씨는 6천원을 받고 건물을 매각하고, 이때부터 오랫동안 개인이 소유하여 사용되어, 집을 보수하는데 있어서 각별히 신경을 썼기 때문에 건물의 수명 연장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경제부에서 일본명의 재산을 국가 소유로 회수함에 따라, 그 건물 소유권을 경제부 명의하에 등기 하고, 토지등기부등본에 권리증을 소유하게 된다. 또한 주민들과의 여러차례 협의 끝에, 모두들 고적으로 간주하여 보전하는 것에 동의하여, 시정부에서 일괄 관리하고 있다.

남문입구
홍마오청 고적 단지 문앞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대문옆 녹색 담쟁이 넝굴이 가득 뻗어 있는 남문이다. 이것은 중국식으로 돌을 쌓아 만든 성문으로 청나라 초기때의 유산이다. 1724년 단수이 통쯔왕치엔(王汧)이 홍마오청을 보수할 때, 동,서쪽에 대문 및 남,북쪽에 소문을 증설하였으나, 영국 임대 후 담장을 보수 할 때 동,서,북쪽 3개의 문을 헐어버리고, 남문만 남겨 출입구로 사용하였다.

보고실 건축물
영국영사관의 고용인 숙소인 이 건물은 1933년 건축가 J.C Wynnes씨가 설계한 사평식숙소로, 1934년 4월 25일 완공되었다. 내부는 4가구가 사용할 수 있으 며 매 가구마다 거실, 침실 및 주방 등 동일하게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후에 사용하면서 칸막이들이 없어지고, 주방도 창고실로 개조되어 사용하였으며, 공중화장실도 담장쪽에 따로 지었지만, 오늘날에는 사라지고 없다.

9개의 국기구역
홍마오청의 9개 깃발은 홍마오청의 300여년 역사의 변천 과정을 대표하는데, 그 기간동안 스페인, 네널란드, 명나라, 청나라, 영국,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및 중화민국을 거처 관리 및 대리 관리해 왔다.
1628년에서 1980년까지 9개의 국가 혹은 정권의 깃발들이 홍마오청의 하늘에 펄럭이고 있다. 가장 최초는 스페인사람으로, 1628년에 가장 먼저 이곳에 왔으며, Fort San Domingo를 건축하였다. 1642년 네덜란드인이 스페인사람을 대만에서 몰아내고, 스페인사람들이 떠나면서 기존의 성채를 허물어 버렸다. 그 근처에 네덜란드인들이 Fort Antonio를 새로이 건축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홍마오청이다. 명나라 시기에는 단수이하구에 파병이 주둔하여 홍마오청을 곡식 저장창고로 사용하였다. 1724년 청나라때는 홍마오청을 보수하면서 4개의 성문을 증설하였다.
그러나「텐진조약」체결 후 후웨이개항으로 무역거래가 되면서 청나라는 영사재판권 및 관세 자주권을 잃게 되어1867년 영국과 청나라는 영구적 임대 계약을 맺으면서 홍마오청은 영국영사관이 인수하게 된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면서 1941년말 단수이 영국영사관은 일본에 의해 폐쇄 조치되고, 제 2차 세계대전이 종료 되기까지 잠시동안 일본 고용인이 대신 관리하였다.
1948년 영국인이 홍마오청으로 다시 돌아왔고, 1972년 영국영사관은 홍마오청에서 철수하여 대영국협회회원국인 오스트레일리아에 위임하여 대리 관리하였으나, 같은 해 중국과 오스트레일리아간의 단교로 인해 미국인이 위임하여 대리 관리하였다. 1979년 중국과 미국이 단교하여, 정부의 협상 노력으로1980년 정식으로 국유로 회수 되었다.

홍마오청 본채광장
1628년 스페인이 단수이에 도착후 군사를 고려하여 단수이하구에 Fort San Domingo를 건축하여, 군사, 정치, 무역 및 기독교 전도의 근거지로 삼았다. 1642년 네덜란드인은 북쪽 지롱을 진격하여 스페인을 꺾고, 허물어진 성채 부근에 Fort Antonio라 불리는 새로운 성을 다시 건축하였다. 이 사각형 성채가 바로 단수이 홍마오청의 유래로, 당시 주민들은 네덜란드인을 붉은 머리카락이란 뜻의 홍마오 (빨간 머리)라 불렀으며, 홍마오청의 유래는 여기서부터 시작 된 것이다.
홍마오청 본채는 바깥은 돌로 내부는 벽돌로 짓는 「외전내석(外石內磚)」건축법을 사용한 매우 견고한 사각형 건물이다. 내부는 위아래 2층으로 나뉘어있으며, 반원통형의 원형천장구조로 만들어져, 위아래층의원형천장 방향이 서로 수직되게 하여 본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영국인이 진주 한 후, 뾰족한형태의 지붕을 평면식으로 개조한 것 외에도 동북 및 서남 모서리에 각루를 증설했다. 2층 남측에 증설된 테라스는 오며 가며 업무를 보는 민중들에게 편리하게 이용되었으며, 또한 단수이강과 직면한 관음산의 테라스에 성첩과 총구를 설치하여,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감시 방어에 용이하게 하였다. 견고한 건축 구조에 방위 및 수비의 기능 설계까지 더하여 홍마오청은 단수이하구에서 지키기는 쉽지만 공격하기는 어려운(이수난공, 易守難攻)군사적 보루가 되었다.
사실 당시 네덜란드인이 건설한 홍마오청의 외관은 현재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다. 보수전 회백색이였던 벽면은 영국인이 임대한 후에, 이층에 테라스, 옥상의 각루를 잇따라 증설하였으며, 외벽도 붉은색으로 칠하여 현재 우리가 보이는 붉은 성채의 모습으로 변화 된 것이다.

홍마오청 본채 일층 실외 공터
본채의 평면은 정사각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변은 약 15.25m로 서쪽은 대만해협을 향하여 단수이 하구를 지키는 요충지며, 남쪽은 단수이강이 내려다 보이며, 맞은편에는 관음산과 서로 바라보고 있다.
그 벽은 약 1.9m로 매우 두꺼우며, 벽 내부는 바깥은 돌로 내부는 벽돌로 짓는 「외전내석(外石內磚)」의 기법을 사용하여 가까운 안쪽 벽체에는 붉은 벽돌로 둥근 아치형의 탑을 만들고, 바깥쪽의 벽체에는 돌덩이를 많이 사용하여 쌓았다. 벽의 가장 외부층에는 원래 네덜란드 시기에 회백색을 칠하여 더욱더 은폐되게 하였다. 영국 임대 시기에 이르러 빅토리아 시대의 풍조에 맞추어 성채 전체를 주홍색으로 바꾸어 칠하였다. 고증에 따르면 그 재료의 원산지는 남태평양 인도네시아 바타비아(자카르타)였으며, 석괴 원자재는 현지것을 사용하였다.
본채의 높이는 약 13m로 내부는 상, 하 이층으로 나눠진다. 하층은 동서향으로 벌어진원형천장 두개가 병렬되어 있고, 상층 또한 원형천장 두개가 병렬되어 있으나, 아치방향은 아랫층과 다르게 남북방향으로 되어 있다. 역학 원리를 응용하여, 상,하 두층의 둥근 아치형은 서로 90도 각으로 하여 결합력을 더욱 강화시켰다. 본채의 동쪽 및 북쪽에는 또한 매우 깊은 참호가 존재하고 있다.

잔디테 니스장
테니스 운동은 14세기 프랑스에서 시작되었으나, 잔디테니스로는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서 최초로 시작되었다. 영국인은 영국에서 잔디테니스를 쳤을 뿐만 아니라, 대만에 와서 홍마오청을 임차했을 때에도 여가활동으로 잔디테니스를 하였다. 1860년 영국은 홍마오청을 영국영사관으로 삼아, 홍마오청 동쪽에 영국 영사관저를 지었다.
홍마오청과 영국영사관저 사이에 넓은 잔디밭이 있는데, 즉 영국인이 당시에 테니스장으로 사용했던 곳으로, 영국 스타일 답게 영사관저 회랑에서 오후 티 타임을 가지면서 잔디장의 테니스를 감상 하였다.

홍마오청 옛포구역
단지 내의 화포 대부분은 영국인이 단수이 혹은 다른 지역에서 발견한 것으로 이러한 화포들을 수집하여 장식물로 삼았으며, 여기에는 청나라 중국식 및 영국식의 화포들이 있다. 청나라의 포는 근 단위로 500근, 800근 및 1200근 등이 있으며, 포 상부에는 청나라 가경제때에 새겨진 문구가 있는데, 그 중 청나라 가경제 시기(재위1796년~1820년) 후웨이에 주둔해 있던 수사수비진영에서 남긴 대포에는 「가경제 18년 여름, 대만주조, 북로단수이진영대포, 무게 800근」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영국의 단포에서는 왕관의 표식을 볼수 있는데, 밧줄을 끼울 수 있게 포 꼬리부분에 고정된 고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선상에서 사용한 것으로, 근거리 방어용 단포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포들은 발사될 때 뒷자석의 힘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두사람이 고정된 밧줄을 꽉 잡아야만 한다. 앞쪽에서 화약을 넣은 후에 포를 틀어막고 불을 붙이는데, 일반적으로 전당포라고 부른다. 만약 부주의로 안에서 터지게 되면 포 뒷부분이 터지게 된다. 단지내에는 앞부분이 터진 포가 존재하는데, 비록 네널란드인이 떠나기전에 파손한 행위였지만, 이것은 매우 진귀하게 여기고 있다.

영국영사관저 외
청나라 광서제(재위1875년~1908년)때에 영국인은 영사관저 증축의 필요성을 느끼고, 즉시1877년에 홍마오청 본채 동쪽 빈터에 일층 목조 영국영사관저 건물을 지어 사무실과 관저를 분리하여 사용하였다. 그러나 습하고 개미들이 많아서 1891년에 2층짜리 붉은 벽돌 건물로 개조하였다. 영사관저 전체는 상 하 두층으로 나누어지는데, 아치형의 회랑식 서양 다층 건물로, 전형적인 영국식민지식 건축물이다. 관저 앞에는 넓은 면적의 녹지를 남겨, 주건물이 그 뒤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아주 독특한 운치를 풍기고 있고 홍마오청은 강한 군사적 면모를 가지고 있어서 또 다른 흥미를 가진다.
영사 관저 정문 양측 기둥에는 12폭의 벽돌 조각품이 있다. 그중 벽돌에 새겨진 「VR1891」의 문구를 볼 수 있는데, VR은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영문을 줄인 말(Victoria Regina)이며, 1891년은 영사관저가 준공된 시대를 의미한다. 가장 특별한 것은 벽돌 조각상에 스코틀랜드의 상징인 「엉겅퀴」와 잉글랜드의 상징인 「장미」가 새겨져 있는데, 그 벽돌조각품이 우아하고 기품이 있어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있다. 외벽 처마에는 벽돌로 쌓아 올린 장식줄이 있으며, 2층 회랑의 외관 바깥쪽에 뱀 배모양의 선들이 있는데, 두 곳 모두 매우 화려하면서 아름답다.
영사관 관저의 높은 지반에는 중국식 화폐무늬의 통풍구가 끼워져 있는데, 이러한 설계는 통풍 기능을 가질 뿐만 아니라 동시에 「부귀영화」라는 행운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중국식 건축 수법은 흔히 볼 수 있다. 영사관저의 옥상의 설계는 지붕트러스 위에 민난(閩南)붉은기와를 까는 것이 주된 특징으로「모임지붕(四坡式斜屋頂)」 이라고 불리는데 배수가 편리할 뿐만 아니라 실내 공간을 더 높혀주고 단열 작용 효과도 있어서 건축 수법상 아주 기발한 아이디어이다.

홍마오청 본채 1층 지하감옥과 옥뜰
본채 1층으로 앞으로 들어가면 화장실, 욕실, 주방 및 순경이 거주 한 곳을 볼 수 있는데, 이 모든 것은 영국인이 홍마오청에 주둔하면서 추가로 지어진 것들이다. 그리고 영사 재판권을 진행하기 위해서 1층의 큰 두 공간을 4개의 작은 감방으로 만들어 대만에서 범법을 저지른 외국인들이 후일 본국으로 돌아가 심판 받을 때까지 잠시 체류하게 하였다. 지하감옥 문에는 여전히 배식구와 정탐구멍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인권을 최고로 보호하고 존중하는 영국인들에게 범법자도 예외일 수가 없었는데, 실외에 범인들의 활동 공간, 즉 옥뜰을 만들어 범인들은 이곳에서 태양을 쐬고 몸풀기 장소로 이용하였다.

홍마오 본채 2층
네널란드인이 홍마오청 본채의 2층을 건축할 시, 넓은 공간에 기둥 하나만 있었는데, 영국사람들이 주둔 한 후에 비로서 4개의 공간으로 분리하여 영사 및 서기 사무실, 응접실, 침실, 주방, 거실로 사용하였다.
홍마오청을 수리 복원하는 공사 중 각 창문 밑바닥 붉은 벽돌 아래 흐릿한 홈을 우연히 발견하였는데, 가포나 포차를 돌리는 공간으로 사용 한 것으로 추정되며, 네널란드 시기에 이미 놓여진 것으로 보인다. 그외에도 벽면 내부는 순수 흙을 반죽하여 쌓아 올린 진흙벽돌이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하였으며, 위쪽에 진흙, 벼 껍데기, 그리고 폐쇄된 문 또한 여전히 남아 있다. 이 문은 영국 초기에 주방과 거실 출입을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테라스를 지은 후에 봉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외에 문서소형금고, 열쇠함, 대형금고, 문서 소각로, 소화기 및 유모차 등 영국인이 남겨 놓은 유품들이 있다.
2층 입구 좌측에는 매우 가파른 목재 계단이 있는데, 옥상 테라스로 올라 갈 수 있으며, 테라스 중앙은 약간 돌출되어 있는데, 그것은 옥상 배수를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다. 옥상 주위에는 성첩이 있는데 영국인이 증축한 것으로 그 특색은 벽돌벽 위에 돌을 코핑(Coping, 壓條) 하였다는 것이다.
홍마오청 본채는 전체적으로 보면 네덜란드와 영국 옛성의 풍격을 결합하여 지어진 건물로, 견고하면서 외관이 웅장한 구조로 단수이 하구에 우뚝 솟아 있다. 고난과 풍파를 거친 대만 역사의 진실을 홍마오청을 통해 알 수 있다.

영국영사관저 1층 회랑
영사관저 1층의 회랑은 활모양의 아치형이고, 2층의 회랑은 반원형의 아치형이다. 회랑은 햇빛을 가리고 비를 피하는 효과를 겸비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당해 관저내의 한가로운 시간들을 더욱 느낄 수가 있다. 관저 회랑의 난간은 녹색의 유약을 바른 화병모양의 난간으로 중국 도예와 서양 화병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특색있는 난간이다.
머리를 들고 영사관저의 1층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동서쪽 양측의 회랑 천장판은 특수한 마루판 기법을 사용했는데, 파도모양의 철판아치형의 구조로,「H형 형강」을 사용하였다. 아주 특별한 이런 종류의 구조는 19세기 말기에 생겨난 건축 기술로 방화 기능까지 겸비하고 있다. 콘크리트 보급 및 사용 되기전에 당시 가장 진보한 건축 기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영국영사관저 1층 입구
영사관저 내부에 있는 많은 방들은 영사와 가족들의 주거지로 제공되었다. 관저는 남향으로 지어졌으며, 내려다 보면 거꾸로의 T자형 구조이다. 1층은 지대에서 약 1m 높이 위에 지어졌으며, 입구에서 실내로 들어가면 곧바로 심혈을 기울여 만든 손잡이가 있는 회전식 계단이 보이고, 1층 서쪽은 거실과 서재, 동쪽은 주방과 코스요리룸, 뒷쪽에는 손님용 세면실과 고용인들 방이 있다. 2층에는 여러 채의 큰 침실이 있고, 또한 여러개의 세면실, 거실, 주방 및 침실이 있으며, 각 방 마다 모두 벽난로가 설치되어 있다.
그 중 거실, 현관 및 주방 마루에는 몇개의 기하모형의 무늬타일이 있는데, 영국에서 수입한 무늬타일로 가던 걸음을 멈추고 잠시 감상할 만한 가치가 있다.

영국영사관저 1층 주방
영국관저안의 주방은 온화하고 우아한 느낌으로 설계되었고, 주방 뒷쪽에 한 칸의 식사준비실이 연결 되어 있는데, 이는 당시 관저내에 계층간의 위계질서가 엄격하여 고용인은 함부로 영사의 공간에 들어갈수 없었기 때문에, 요리사는 주방에서 요리를 마친 후에 고용인이 식사준비실에 요리를 옮겨 놓고, 식사가 시작될 때 다시 요리를 창구쪽에 진열해 놓으면 음식을 서비스하는 고용인이 테이블로 가져 가는 것이다. 벽난로 옆쪽과 주방문 앞에 호출벨이 설치되어 있어서 영사가 버튼만 누르면 교환벨이 울리면서 각 그 방의 번호판이 내려가기 때문에 집사는 영사의 위치를 확인하고 즉시 필요한 서비스를 할 수 있다.

영국영사관저 1층 거실
영국인이 떠날때 대부분의 가구들은 가지고 갔고 현재 보이는 가구와 인테리어들은 당시 사진과 문헌을 통해 재현해 놓은 것이다. 1891년부터 지금까지 유일하게 변화가 없는것은 발 아래 밟고 있는 바닥타일로, 빅토리아 타일이라고 부르며, 어떤 사람들은 무늬타일 혹은 상감(鑲嵌)타일이라고도 부른다. 이러한 타일의 특색은 흙과 안료를 혼합하여 구운 것으로 전체적으로 색깔과 광택의 고도가 일치하여 마찰이 가해져도 퇴색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타일들은 영국에서 이미 단종되었기에 더욱 귀하게 여겨진다. 두루마기식의 큰 꽃 장식 커텐은 당시에 가장 유행한 색이다. 실내에는 벽난로를 설치했는데, 고위도 나라에서 저위도 지역으로 온 영사에게 벽난로는 추위를 막기 위한 용도라기 보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반영한 것이다. 동시에 습기도 제거 해주는 효과도 있다. 거실과 주방에 있는 전동 천장 선풍기는 1941년 영국 G.E.C.Kingsway에서 생산한 것으로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영국영사관저 1층 서재
거실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서재는 확실히 다르게 타일을 사용했는데, 영국인들은 개인과 대중공간을 확실히 다르게 구분하여 표현하였다. 일반적으로 거실, 현관, 주방 등과 같은 대중 공간들은 주인의 기품과 신분을 드러내기 위해 서재나 침실 등 개인공간보다 더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즉 서재 벽난로의 양식을 보면 거실과 비교 했을때 아주 간단하게 꾸며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영국의 주권을 상징하는 마크는 영국이 홍마오청을 임대할 시기에 남문과 홍마오청 본채위에 걸려져 있었는데, 원래의 문장은 영국이 떠날 때 가져갔고, 현재 서재에 전시된것은 복제품이다.

영국영사관저 1층 고용인호출벨 및 고용인 공간
계층의 공간을 중시하는 영국은 주인과 고용인과의 공간을 엄격하게 구분하여 영국영사관저는 거꾸로한 T 자형의 구조 안에 자리잡고 있는데 전방 2층짜리의 건물은 주인의 공간으로, 후방은 고용인이 생활하는 공간으로 구분되어 있어서 주인이 필요할 때 외에는 고용인이 함부로 주인의 공간에 들어갈 수 없었다.
영사관저 일층의 고용인 공간에는 고용인 호출벨이 설치 되어 있는데 주인이 고용인을 호출하기 편리하도록 설치된 일종의 전화벨이다. 호출벨의 버튼은 현관, 거실, 주방, 침실 등에 설치되어 있으며 주인이 각 방에서 버튼을 누르면, 교환벨소리가 울려퍼지면서 각 방의 대표번호가 동시에 내려가면 고용인은 어느곳에서 즉시 서비스가 필요한지 알수 있게 된다.

용도(甬道)의 건축 재료
용도 하부의 건축 재료는 치리안석(唭哩岸石)이며 이는 사암의 일종이다. 용도는 습기가 많은데 석재는 긴 세월 동안 어둡고 습한 환경에 있으며 이끼가 생기고 검푸른 상태가 된다. 이러한 상태는 정상적인 현상이며 석재에는 석영(이산화규소) 성분이 있으므로 햇빛에 비치면 반짝거리고 광택 있어 보이며 눈부셔 보인다. 지금은 채광이 금지되었지만 이는 옛 타이완 건축 재료 중 중요한 재료의 하나다.

용도의 건축 구조
용도 상단의 건축 재료는 벽돌이며 이를 아치형 구조로 쌓았다. 벽돌은 샤먼(廈門)의 수공 벽돌이며 벽돌과 벽돌 사이에는 삼합토(찹쌀, 흑설탕, 석회)를 접착제로 사용했다. 샤먼벽돌의 특유한 위아래로 파인 구조 덕분에 벽돌면의 마찰력은 강화되어 마치 목제 사개 구조처럼 되어 있다. 또한, 아치형 건축 구조 덕분에 용도는 위에 있는 두께가 약 2미터 되는 흙과 나무도 지탱하고 있다. 이러한 건축 구조는 내진(耐震) 건축공법이기도 하다.

용도의 구명 유적
용도 양측 벽면의 치리안석(唭哩岸石)에는 좌우로 대칭이 되는 직사각형 구멍이 있는데 이 구멍들은 용도 밖으로 통하지 않는다. 합리적인 추측에 의하면, 이것은 청나라시대에 포대를 설립했을 때 아치형 지붕을 짓기 위해 건설 노동자들이 비계 설치할 때 남긴 자국이다. 시대가 지나면서 포대는 청나라시대, 일제시대, 국민정부시대, 국군주둔시기를 겪었고 용도는 군영으로 사용되었으며 국군은 양쪽에 있는 구멍을 이용하여 나무 막대기를 설치하여 위에는 병사들이 잠자는 침대로 사용됐고 아래는 통로 및 군비실(軍備室)로 사용되었다.

용도의 벽
청나라시대에 시멘트 벽 보수공사시 용도는 사방이 뚫렸고 칸막이가 없는 피신처로 추측된다. 병사들은 용도 안에서 편하게 다닐 수 있으며 밖으로 폭로되지 않은 구조는 안전을 고려해서 설계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칸막이는 국군이 용도에 있으면서 생긴 필요로 만든 것이다. 이 벽은 딱 봐도 시멘트로 만들어진 벽이고 벽면에 노출된 벽돌도 샤먼벽돌과 다르다. 이처럼 이 벽은 국군 주둔시 공사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으며 공사하게 된 이유는 기밀성 및 관(官)과 병(兵)의 직급을 구분하기 위해 따로 공간을 만든 것이다.

목제 블라인드형 미닫이창
목제 블라인드형 미닫이창은 재건축시 새로 만든 것으로 추측되지만 건축 양식은 원래 모습을 지키려고 했다. 이러한 목제 블라인드형 미닫이창은 과거 민가에서 흔히 사용되는 건축 구조로써 햇빛, 공기, 풍량을 조절할 수 있다. 포대는 서양식 건축 구조이지만 창문은 중국식 건축 양식을 사용하여 중국과 서양의 건축 구조 장점을 모두 활용했다. 창문의 목판 숫자는 홀수인 것은 양택(陽宅)의 풍수 길수(吉數)에 맞게 만들어진 것이다. 〈홀수는 양(陽)이고 짝수는 음(陰)이다.〉

용도의 공간 활용
후웨이 포대는 청나라시대의 서양식 포대이며 이의 구조는 상당히 잘 설계되었다. 이는 1985년에 국가 2급 고적으로 지정되었고 현재 국정 고적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이는 매우 진귀한 역사 건물이다. 용도는 대외적으로 개방된 이후 수많은 방문객을 끌어들였고 벽을 친 용도 내에서는 정기 전시회가 열리며 수시로도 각종 전시가 열리고 있다. 고적 본체가 파괴되지 않기 위해 과거 전시 개최시 철제 플레임을 설치했는데 이는 전시품을 걸기 위한 것이며 지붕 지탱용은 아니다.

옥스퍼드 대학교
옥스퍼드 대학교는 단수이와 두터운 관계를 가진 마졔(馬偕, George Leslie Mackay)가 지은 건물이다. 1880년, 마졔가 처음으로 캐나다로 귀국하여 8년간 타이완에서의 선교 성과를 보고했을 때 이는 고향 사람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고 고향 사람들은 그가 학생들을 위해 수업할 때 큰 용수 아래서 푸른 하늘을 천장으로 하고 푸른 잔디를 돗자리로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므로 옥스퍼드셔의 사람들은 마졔가 타이완에 돌아가서 학교를 지을 수 있도록 아낌없이 기부하였고 마졔는 이 기금으로 토지를 사서 직접 현대화 학교의 설계 및 설립, 감리를 했다. 이렇게 지어진 타이완의 첫 신식 학교는 1882년 7월에 완공되어 개학을 맞이했고 “옥스포드대학교”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옥스퍼드셔 사람들이 기부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 건물의 영문 이름을 “Oxford College”로 지었고 후세들은 중국어로 “뇨우진학당(牛津學堂)”이라고도 불렀다.
옥스퍼드 대학교는 시멘트 건축 재료 대신 찹쌀, 오당(烏糖), 석회, 모래를 섞어서 사용했고 샤먼(廈門)에서 가져온 벽돌과 기와도 건축 재료로 사용했다. 이 건축물은 북쪽에 위치하고 남쪽을 향하며 타이완 사합원(四合院)을 모방한 중국과 서양의 특징을 결합한 건축이다. 옥스퍼드 대학교는 진리대학교(真理大學校) 내에 있으며 근처에는 홍마오청(紅毛城), 전 청나라 단수이 관세무사 관저(前清淡水關稅務司官邸), 단수이여학당(淡水女學堂), 마졔묘원(馬偕墓園), 외교묘원(外僑墓園), 팔각루(八角樓) 등 역사적 의미와 예술적 가치를 지닌 건축들이 있다.

공스톈시 정씨 옛집
“공스톈시 정씨 옛집”은 신베이시(新北市) 단수이구 내에 있는 역사 건물이고 전통 민가다. 옛집의 정확한 설립연대는 알 수 없지만 학자 및 전문가는 1884년 청-프랑스전쟁전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한다. 청-프랑스전쟁시 후웨이전쟁이 일어났을 때 청군(清軍)은 이곳에서 주둔했고 프랑스군을 소탕하고 승리했다. 옛집은 단수이구 단하이(淡海) 신도시 개발지역에 있으며 백 년 가까이 되는 단수이의 민난(閩南)건축 특색을 보여주고 주거환경에서 풍기는 문화향기를 풍기고 있다. 공스톈시 일대의 개발은 네덜란드 식민시대까지 거스를 수 있다. 정씨 옛집은 해당 지역에서 얼마 남지 않은 농가 중의 하나며 주변은 대나무와 갈대로 둘러싸였고 도랑물이 흐르고 있으므로 대표적인 옛 농업사회 시절의 삼합원(三合院) 건축 양식을 갖췄다. 이는 보존이 잘 되어 있으며 단수이지역의 개발사를 지켜봐 왔다.
신베이시 단수이 레저농업협회(淡水休閒農業協會)가 정씨 옛집을 운영하는 기간에 문화예술체험, 농촌교실, 여행 등을 이 소박한 삼합원에 접목한 덕분에 정씨 옛집은 신베이시 삶의 미학과 문화 및 창의력의 예술 근거지로 되었다.

단수이 룽산사
대만에서 비교적 유명한 룽산사는 총 5개가 있는데 각각 단수이(淡水) 룽산사, 타이베이멍쟈(艋舺) 룽산사, 타이난(臺南) 룽산사, 펑산(鳳山) 룽산사, 루강(鹿港) 룽산사다. 단수이 룽산사는 1858년에 건립되었고 관음보살이 본전에 모셔지고 있다. 옛 단수이 룽산사 앞에는 광장이 있었고 뒤에는 정원이 있었으며 근처에는 단수이의 대표적인 시장이 있었다. 1884년 청-프랑스전쟁 기간에 관음보살께서 단수이 주민들의 무사평안을 지켰다고 전해지면서 이 사찰에는 신께서 기적을 내렸다는 신비로움이 더해졌다.
룽산사는 서쪽에 있고 동쪽을 향하며 고박한 건축 양식을 지닌 민난(閩南) 전통 건축이다. 이의 평면 배치는 좁으면서 길고 석조, 목각, 신기(神祇)의 소상이 가장 정교하고 아름답다. 옛시장 내의 주상복합 지역에 있기 때문에 단수이 룽산사는 마치 하늘이 보이지 않는 시장에 숨겨져 외부사람들이 발견하기 쉽지 않다. 사철 동쪽 입구와 남쪽의 칭수이졔(清水街)는 서로 인접하고 칭수이졔에는 오랜 세월 동안 고정 노점상이 자리를 차지했다. 원래도 좁은 칭수이졔에는 점점 노점상들이 모이는 시장으로 발전했고 각 노점상마다 설치한 캐노피가 연결되어 칭수이졔는 마치 하늘을 볼 수 없는 “암가(暗街仔)”로 변해 현지 환경 및 위생에 일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암가(暗街仔)”라는 특수한 거리의 광경은 대만에서 흔히 볼 수 없게 되어 더욱 귀한 존재라고도 할 수 있다.

단수이 푸여우궁
타이완해협(臺灣海峽)의 바다 기상이 예측하기 힘들기 때문에 초기 타이완 이민자는 “검은 물길(黑水溝)”이라고도 불리는 위험한 타이완해협을 지나야 타이완에 올 수 있었으며 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파도에 묻힐 수도 있었다. 당시에는 심지어 “6명은 죽고 3명은 살아남으며 1명은 돌아가게 된다.(6死3留1回頭)”라는 속어까지 생겼는데 이 속어는 도해(渡海)의 어려움을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이민자들은 출발하기 전에 먼저 마조묘(媽祖廟)에 가서 타이완에 순조롭게 도착하기를 기도하고 타이완에서 사업이 성공하면 타이완에서 묘를 지어서 환원(還願)했다. 이처럼 마조는 타이완 민간에서 가장 보편적인 신앙이 되었다. 단수이 푸여우궁은 1782년에 착공되고 1796년에 완공되었다. 당시의 후웨이항(滬尾港)은 타이베이분지(臺北盆地)의 상륙항이었기 때문에 다양한 호적을 가진 사람들이 기부했는데 이는 각지 사람들이 마조에 대한 신앙을 보여주고 있다. 푸여우궁은 단수이 옛거리에 있으며 이는 충졘졔(重建街)라고도 불리는 단수이 옛거리의 치즈닝(崎仔頂)의 기점에 있고 후웨이졔(滬尾街)의 중심에 있다. 단수이 푸여우궁은 후웨이졔와의 발전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단수이 푸여우궁은 북쪽에 위치하고 남쪽을 향하며 앞에 있는 단수이강(淡水河)과 매우 가깝고 뒤에는 바로 치즈딩(崎仔頂)이 있으므로 “앞에는 물이 거울을 하며 뒤에는 산이 병풍을 한다(前有水為鏡,後有山為屏)”라는 좋은 지리형세를 갖추었다. 석조는 푸여우궁의 장식중에서 가장 복잡하고 훌륭한 부분이며 관음석(觀音石)을 재료로 많이 사용했고 주제는 다양하다. 기린부터 시작해서 용, 백호, 까치, 박쥐 등 각종 상징과 의미를 가진 동물이 조각되었고 농업사회 “어초경독(漁樵耕讀)”의 다양한 삶의 모습도 보여주고있는데 이들은 소박하면서도 생명력이 넘쳐 보인다. 그중 가장 독특한 전조(磚雕)는 행복한 삶, 부유, 장수 등 의미가 담긴 상징적인 그림을 보여주고 있고 당시 사람들이 바라는 삶의 목표를 반영하고 있다.

이산사
청나라 사묘사(寺廟史)상 타이완에는 2개의 정광불사(定光佛寺) 밖에 없는데 하나는 중부지역에 있는 장화(彰化)의 정광암(定光庵)이고 나머지 하나는 바로 단수이에 있는 이산사(鄞山寺)다. 단수이의 이산사는 1822년에 지어졌고 이는 대체로 원래의 모습이 보존되어 있으며 심지어 일반 사묘에서 보존하기 힘든 용마루와 진흙 조소도 상당히 잘 보존되어 있으므로 타이완 건축사에서는 상당한 연구 가치가 있다. 이산사는 민시팅저오(閩西汀州)의 소수 하카(客家) 이민자의 신앙 중심이며 아울러 이민 “회관”의 기능을 갖춘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단수이 이산사의 좌우 호실(護室)에는 몇 개의 객실이 있으며 이는 같은 고향 사람들의 임시 거처로 사용되었다.
이산사의 건물 배치는 융딩(永定) 건축의 특징을 반영했을 뿐만 아니라 해당 사묘가 동쪽에 있고 서쪽을 향하며 다퉌산(大屯山)을 뒤로 했기 때문에 마치 교의(交椅)처럼 생겼다. 또한, 단수이 하구를 향하므로 형세가 웅장한 경치가 펼치는데 이러한 지리적 특징은 풍수전설에서 “두꺼비혈(蛤蟆穴)”이라고 부른다. 아마도 이러한 호칭에 어울리기 위해 절 뒤 좌·우측 마당에 있는 우물 2개는 두꺼비 눈으로 간주되고 절 앞의 반월지(半月池)는 두꺼비 입으로 상상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건축 위치와 배치는 소위 “뒷산을 병풍으로 하고 앞에 있는 하천을 거울로 한다(後山為屏,前水為鏡)”라는 풍수보지(風水寶地)에 부합하다. 삼천전(三川殿)의 채사(彩獅), 호랑이, 기린의 설계에도 독특한 사상이 담겨 있다. 채사(彩獅)는 깃발과 공을 다루고 있으며 기린은 극과 경을 휘두르고 있는 것을 합쳐서 보면 “길경기구(祈求吉慶)”, 즉 길경(吉慶)을 기구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하늘과 이땅에 대한 선조들의 감사의 마음은 이산사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전 영국 쟈스양행 창고
1862년 단수이 해관은 정식으로 개방 및 징세했고 단수이항(淡水港)은 빠른 속도로 타이베이 북부지역의 가장 큰 항구가 되었다. 이의 무역량은 타이완 무역량의 60% 이상을 차지했으며 차, 석탄, 장뇌(樟腦)가 주요 수출품이었다. 1897년 영국회사 로열더치셸은 쟈스양행(嘉士洋行)을 인수하였고 쟈스양행은 극동지역 무역의 일환이 되었다. 영국회사 로열더치셸은 계속해서 창고, 유조(油槽)를 증설하여 석유제품을 보관하는 창고로 사용했다. 또한 컨테이너로 석유제품을 적재할 수 있도록 철도를 개설하여 단수이 철도와 연결했으므로 이곳은 “쉘창고”로도 불린다. 초기에는 각종 석유제품으로 인한 찐한 석유 악취 때문에 단수이 사람들이 이를 “취유잔(臭油棧, 악취 나는 석유창고)”라고 불렀다. 1944년 10월 미군 비행기가 타이베이 북부지역을 공습했는데 당시 유조가 폭격에 맞아 불이 났고 3일이 지나서야 불이 진압되어 이 사건은 단수이 사람 기억중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취유잔 화재 사건”으로 각인되었다. 그 이후로 쉘창고는 점점 몰락되어 예비 창고로만 사용되었다.
이곳에는 큰 창고 4개, 작은 건물 3채, 유조(油槽) 유지(遺址)가 있고 토지 면적은 약 4천 평이 된다. 이곳은 단수이의 개항(開港), 일본인의 대만 점령, 2차 세계대전시 타이완에 향한 미군의 폭격 등 중요한 역사적인 순간들을 지켜봐 왔으며 타이완 극소수의 공업 유지(遺址) 및 고적이다. 2000년 6월에 정부는 전 영국 쟈스양행 창고를 고적으로 공고했고 로열더치쉘은 이 백 년 고적을 현지 문화단체에 기증했으며 이는 지금의 단수이 문화 기금회로 발전했다. 단지 내에는 “단수이 로열더치쉘 역사관”이 있고 이곳에서는 로열더치쉘 창고의 역사 및 연혁이 전시되고 있다. 이곳 또한 단수이 커뮤니티칼리지가 수업을 진행하는 장소이며 수시로 다양한 예술 문화 전시 및 공연 활동이 개최되고 있다.

후웨이졔의관
1879년, 마졔는 같은 성씨인 미국 국적의 선장 부인의 기부금을 받아 병원을 짓게 되었다. 마졔 선장 부부를 기념하기 위해, 기부금을 활용하여 중국과 서양의 건축 장점을 결합한 이 건물을 “후웨이졔의관(滬尾偕醫館)”으로 불렀다. 이 병원은 타이완의 첫 서양식 병원이다. 1884년의 청-프랑스전쟁은 단수이까지 만연되었고 후웨이졔의관은 구호활동을 시작하여 다친 군인 및 민간인을 구조하는 역할을 했고 류밍촨(劉銘傳)은 이러한 선행을 표창하였다. 1901년, 마졔가 별세함에 따라 병원은 일시적 운영이 중지되었지만 1906년 캐나다의 사숭야거(宋雅各, Dr. J. Y. Ferguson)가 타이완에 오면서 이는 다시 운영을 시작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단수이항(淡水港)이 점점 몰락하고 있는 것을 감안하고 시대에 맞게 병원 규모도 확대하고 타이완 의료의 선구자인 마졔를 기념하기 위해 1912년에 타이베이 마졔 기념병원이 설립되어 이는 후웨이졔의관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졔의관은 마졔가 설계한 병원이고 건물 자체는 민난(閩南)식의 민가이며 중국식의 민난(閩南) 기와와 서양식 아치형의 문과 창문이 공존하는 흥미로운 건물이다. 이 건물은 단수이의 유명한 미장이가 지은 것이다. 병원의 외관은 소박하고 내부는 단순하고 방정하지만 당시에는 매우 현대적인 병원이었고 병례 파일, 의학 보고도 있었으며 환자가 문진을 접수할 때는 검정색, 흰색 목패로 초진인지 재진인지 구분하는 시스템도 갖추었다. 또한, 대기할 때는 위생보건 등 민중들을 위한 교육이 제공되었다. 1912년 병원은 운영종료한 이후로 신학교, 도서관, 유치원, 학생 기숙사로도 사용되었고 건축 자체도 재건축한 적이 있으며 1992년에 마지막으로 재건이 완료되었다.

단수이 예배당
마졔 박사 덕분에 단수이는 타이완 북부지역 기독장로교회의 발전 근거지로 되었다. 마졔는 1872년 3월 9일에 단수이에 도착하였고 적극적으로 선교활동을 하면서 민난어(閩南語)와 지방문화에 대해 열심히 연구했다. 원래 임대했던 집은 병원으로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선교 장소이기도 했으며 이것은 초대의 성당이다.
단수이 예배당은 1901년 마졔가 별세하면서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다. 실상황과 확대의 수요에 따라 예배당은 1915년에 북미 건축양식으로 재건축되었는데 이는 벽돌로 지어졌고 연회색의 벽으로 이루어져서 백색예배당(白色禮拜堂)으로 불리게 되었다. 또한, 종루는 정문 바로 위에 있다. 1928년에는 사용에 지장이 생겨 재건축하게 되었는데 재건축 경비 중 일부는 교회 사람들, 학생과 각 교회의 기부금이었고 대부분 경비는 마졔의 아들 졔루이롄(偕叡廉, George William Mackay)이 캐나다 모회(母會)에 신청한 보조금이며 이는 직접 예배당의 설계와 감리를 했다. 예배당의 재건축은 1932년에 시작되었고 1933년 9월 30일에 완공되었다. 아름다운 단수이 예배당은 현재 단수이 옛거리에서 유명한 관광지로 되었다.

부두 제방의 배수구
해관 부두는 타이완 근대사에서 계속해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오늘날 이곳에서는 청나라시대, 일제시대, 2차 세계대전 후 3개 시대의 건물을 볼 수 있다. 단수이 항구가 번영할 때는 10여개 국가의 배가 이곳에 정박했다. 부두 구역 내부에는 청나라시대의 양루(洋樓)와 일제시대의 항무창고 2개가 있는데 이것들은 단수이 개항, 통상 당시부터 설립되고 시대의 흐름을 지켜봐 온 장소들이다.
이 위치에서 다리 맞은 편을 보면 부두 제방의 배수구가 보이고 만조(滿潮)시 배수구는 강물에 잠긴다. 배수구는 제방과 수직하는 곳에 설치되어 있으므로 이곳에서만 볼 수 있다. 부두 구역의 배수구에는 철제 울타리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것은 동물 또는 강물에 섞인 쓰레기 또는 오염물질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해관 부두 삼판선
단수이 해관은 19세기 하반에 타이완의 최대 무역항이었다. 하지만 하구에 진흙과 모래가 퇴적하고 타이완 중관철도(縱貫鐵路)의 건설이 완공되면서 단수이항의 역할은 지룽(基隆)이 대체하게 되었다. 한때 단수이항을 항행했던 대형 상선과 돛단배는 현재 삼판선(舢舨船)으로 되었다.
단수이 삼판선의 가장 큰 특징은 선두의 어안(魚眼) 채색 도안이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청나라시대 중국과 대만 사이를 오가는 선박이 평안귀항을 보우(保佑) 받기 위해 채색 도안 그리는 전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해석된다. 어안으로 화물선인지 어선인지도 구분할 수 있다! 화물선의 어안은 “앞을 본다”. 이는 배가 방향을 정확하게 판단하여 신속하고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어선은 “아래를 본다”. 이것은 물고기떼의 움직임이 보이고 높은 어확량을 기도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현대 조선 기술의 영향을 받고 선박의 내파성(耐波性)을 고려했을 때 새로 만드는 선박들은 설계 단계에서 유체역학원리를 중요시하고 선박 외관은 유선형이 강조되면서 전통 삼판선의 모습은 점점 수면에서 사라지고 있다.

번화한 후웨이 양관(洋關)
후웨이관(滬尾關)은 신관(新關)(양관[洋關] 또는 해관으로도 불림)에 속하며 국제 화물 관세를 징수했다. 당시 상관(常關, 또는 구관[舊關]이라고 불림)이라는 곳도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국내 거래 화물세를 징수했다. 개항전 타이완의 무역 대상은 중국이 주고 그 다음으로는 일본, 남양이었으며 이는 개항함에 따라 국제 무역항으로 떠올라 무역 대상은 세계각지에 분포하게 됐다. 1888년 후웨이항의 무역액은 정점에 달했고 타이완 총 무역액의 74.9%를 차지했다.
수출 무역의 왕성은 수출입 무역과 대량의 종업원을 데려왔으며 이로 인해 현지 인구도 증가됐고 중국 이민도 점차 타이완으로 이민하게 되면서 반챠오 린씨(板橋林家) 등 대가족도 탄생하게 되었다. 단수이항의 무역이 번성해지면서 타이완 북부의 세입은 차(茶), 장뇌의 수출로 남부의 세입을 초월했고 타이완의 경제 중심도 이전되었다. 이또한 류밍촨(劉銘傳)이 정치 중심을 북부로 이전하게 한 중요한 원인이다. 번성한 무역 덕분에 타이완 세입은 점차 증가했고 이 또한 청나라 말에 타이완이 철도를 개설하고 케이블, 전보 등 현대화 설비를 가설하게 된 주요 원인이다.

충의지
군대는 해관 부두를 접수한 이후로 이곳에서 많은 건물을 지었다. 단지 입구에 있는 연못은 충의지(忠義池)라고 부르고 이는 해군의 “충의(忠義)” 군풍(軍風)을 상징한다. 현재의 충의지 연못가에는 “교유사해(蛟遊四海)”라고 적혀 있는 돌이 있는데 이것은 해군이 이곳에 주둔했고 군대가 이곳을 접수했다는 역사도 보여주고 있다.

반세기를 지켜봐 온 진귀한 용수
단수이 해관 부두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것이 우아하고 광활한 관인산과 단수이 강변 풍경이다. 해관 부두를 즐기는 가장 좋은 방식 중 하나가 바로 제방가의 용수 그늘에 앉아 조용하게 여유로운 분위기를 즐기는 것이다.
단수이 해관 부두의 용수는 대체로 많은 사람이 팔을 펼쳐야 안을 수 있는 큰 나무며 이 용수들은 우뚝 솟아 있다. 석조가 피어오르는 부두와 제방에서 나뭇가지들이 제방을 따라 펼치고 수면에 늘어뜨리는 경치는 매우 우아해 보인다.
용수는 천근성 나무이므로 평평한 땅에서 토지 및 수분을 유지하는 데 좋은 효과를 가지고 있으며 바람에 날리는 모래를 막을 수 있으므로 해변 또는 강변에 방풍림으로 심기에 매우 적합하다. 하구에 가까운 단수이 해관 부두의 토지는 습하므로 용수를 심기에 매우 적합하며 일제시대 때 단수이 세관 주위에는 굉장히 많은 용수를 심었으며 이는 하나의 독특한 강변 경치로 되었다.

서쪽 부두와 해관 비경(秘境)
현재 있는 위치는 해관 부두의 서쪽 제방이며 서쪽 부두는 약 1901년에 착공되었으며 구조와 건축 재료는 동쪽과 대체로 같다. 그러나 계선주(繫船柱)는 콘크리트 원기둥형인 것으로 동쪽과는 큰 차이가 있으며 서쪽 계선주는 후기에 수리된 것으로 추측된다. 단수이 해관 부두의 시야는 매우 좋으며 관두대교(關渡大橋), 관인산, 단수이 하구, 타이베이항을 볼 수 있다. 이곳은 숲에 가려져 있어 관광객들이 그냥 지나가버리는 경우가 많으므로 현지인만 아는 아름다운 해경을 즐길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이며 이곳 또한 해관 비경(秘境)이라고 할 수 있다.

군대가 접수해서 관리한 부두의 세월
이 사진은 1951~1961년 사이에 인력거를 사용하던 시대를 찍은 것으로 추측되며 당시의 도로는 2개의 도로인 것으로 아직 오늘날의 4선 도로로 넓히지 않았다. 촬영자는 홍마오청(紅毛城) 옆 가축시험소 정문이 위치한 도로에서 찍은 것으로 추측된다.
사진 중 해관 부두의 A동 양루(洋樓)와 B동 창고가 보이며 군영의 농구대도 보인다. 군대는 B, C동 창고 옆에서 숙소를 지었으나 지금은 철거됐고 사람들이 소풍도 하고 휴식도 취할 수 있는 잔디구역으로 변경했다. 또한 민중들이 즐기고 사진 찍을 수 있도록 수시로 대형 예술 작품이 설치되고 있다.

일제시대 창고
부두 구역의 건설은 청나라시대부터 시작됐고 일제시대인 1920년 말에 부두 공사가 완공되어 현재 모습을 점차 갖추게 되었다. 그중 2개의 창고는 화물 보관용으로 보류되었고 벽면은 청수홍전(清水紅磚)을 사용했으며 건물 내부에는 나무벽이 가설되었으며 창틀 및 문틀은 흰색 페인트로 칠했기 때문에 강렬한 색깔의 대조가 이루어져 있다. 벽체뿐만 아니라 트러스도 서양식 건축양식을 택했고 건물 외관은 매우 깔끔하며 실용성을 중요시하는 건축이다.
해관 부두는 하구에 있으며 평소에는 습기가 많으므로 강풍 및 폭우를 방범해야 하며 창조(漲潮) 기간에는 해수역류 현상이 생길 수도 있다. 과거 창고 내에 보관된 상품은 건조 상태를 유지해야 부패 및 곰팡이를 피할 수 있는데 B, C창고의 통기공은 외부가 낮고 내부가 높으므로 기류가 외부로부터 실내로 들어올 경우 무거운 습기가 벽을 따라 올라가기 어렵다. 또한, 외부의 통기공에서 파도가 쳐도 내부 통기공 높이가 더 높으므로 바닷물이 창고에 들어가기 쉽지 않다. 에어컨 설비가 없는 시대에 이미 이러한 절묘한 건축이 설계된 것을 보면 건축사의 꼼꼼함을 느낄 수 있다.

독특한 창고 지붕 트러스
트러스는 지붕을 지탱하는 거대한 삼각형 구조이며 서양식 창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붕 구조다. 건물에는 상당한 양의 물품을 보관해야 하는데 트러스구조를 이용하면 지붕 면적이 커지므로 전체 창고 공간도 확대된다.
단수이에는 백 년 가까이 된 창고가 3개 있는데 창고마다 다른 트러스 구조로 되어 있다. 트러스 구조는 각각 단수이 해관 두부 창고(정부 지정 고적), 전 영국 쟈스양행 창고(정부 지정 고적), 더글러스양행(기념성 건축) 3개의 백 년 창고에서 볼 수 있다.
해관 부두에 있는 B, C동 창고(위 그림 참조)는 킹 포스트 트러스(King post truss) 구조로 삼각형 구조 중앙에 수직재가 있다. 이러한 트러스 구조는 타이완에서 흔히 볼 수 있으며 특히 1920년대 후의 창고, 강당, 철도 플랫폼 비마개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전 영국 쟈스양행 창고(우측 하단 그림 참조)는 퀸 포스트 트러스(Queen post truss)를 이용했는데 이런 구조는 삼각형 구조에 2개의 수직재를 설치하는 트러스 구조다. 이는 전 영국 쟈스양행 창고 고적 구역의 B, C 창고에서 볼 수 있다.
더글러스양행(좌측 하단 그림 참조)의 앞 건물 “제1 검사장”은 고딕 건축양식을 모방한 목재 아치형 트러스다. 외관적으로 독특하고 우아하며 이러한 트러스 구조는 타이완에서 유일한 존재이므로 더욱 특색을 갖고 있다.
